기존 양허 제외품목 개방 우려 정부는 냉장고 등 수출만 주력 농업계, 또 희생양될까 ‘불안감’
우리나라의 농축산물시장 추가 개방을 원하는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개선 협상이 코로나19 발생 이후 대면으로 4년 만에 열렸다. 농업계는 FTA 체결로 수입량이 급증한 칠레산 농축산물이 자칫 우리 식탁을 점령할 수 있다면서 잔뜩 긴장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는 22∼24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한·칠레 FTA 개선을 위한 제7차 공식협상’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번 협상은 2021년 10월 6차 협상 이후 2년 만에, 대면 협상 기준으로는 2019년 10월 3차 협상 이후 4년 만에 열린 것이다. 개선 협상에서 칠레 정부는 줄곧 한국의 농축산물시장 추가 개방을 요구해왔다. 2002년 한·칠레 FTA 협상 타결 당시 관세 철폐를 하지 않았거나 미뤘던 농축산물의 관세를 없애라는 것이다.
당시 한국과 칠레는 칠레산 농축산물 1432개(HS 10단위 기준) 가운데 쇠고기·닭고기·마늘·양파·고추 등 민감품목 391개는 세계무역기구(WTO) 차원의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 종료 후 개방 수준을 다시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또 쌀·사과·배 등 21개 품목은 양허(관세 인하·철폐) 대상에서 제외했다. 나머지 품목은 관세를 즉시 철폐했거나 5∼16년에 걸쳐 단계별로 철폐했다.
하지만 2001년 출범한 DDA가 참여국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끝내 협상이 결렬되자 칠레는 한·칠레 FTA의 개정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칠레 정부는 DDA 협상 종료 후 재협상하기로 한 이른바 ‘DDA 품목’ 391개의 시장 개방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번 7차 협상에서도 칠레 정부의 요구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6차 협상 이후 2년 만에 열린 협상이기 때문에 이번 7차 협상은 양측의 요구와 입장 차이를 재차 확인하는 수준으로 진행됐다”며 “농축산물시장 개방에 대한 칠레 정부의 요구는 이전과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고 밝혔다.
문제는 391개 품목에 국산 농축산물 소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품목이 대거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칠레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농축산물 수출국이다. 국제 무역통계사이트 OEC에 따르면 칠레는 2021년 가금육 수출액이 4억9600만달러(6540억원)를 기록하는 등 세계에서 15번째로 큰 가금육 수출국이다.
감귤류 등 신선과일도 최근 재배면적이 대폭 증가하면서 수출 대상국을 늘리고 있다. 미국 농무부 해외농업국(USDA FAS)에 따르면 2021년 칠레의 만다린 재배면적은 1만1194㏊에 이른다. USDA FAS는 “칠레는 미국 외 감귤류 수출 대상국을 다양화하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다”며 “2020년 5월에는 레몬·만다린·오렌지·자몽 수출을 위해 중국시장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칠레는 한국에 자몽·오렌지 수출을 희망한다며 우리 검역당국에 이미 수입위험분석 서류를 낸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측은 칠레에 한국산 냉장고·세탁기의 관세 철폐를 요구하고 있어 농업협상이 더욱 불리해지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2002년 한·칠레 FTA 협상 타결 당시 우리 정부가 칠레산 사과·배를 양허 대상 품목에서 제외하자 칠레는 한국산 냉장고·세탁기 관세(6%)를 깎지 않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후 칠레는 FTA 체결국을 확대, 칠레시장에서 우리의 주요 경쟁국인 멕시코·스웨덴·독일 모두 냉장고·세탁기에 대해 무관세 혜택을 받고 있다.
이에 농업계는 칠레산 농축산물 수입이 또다시 폭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칠레산 농축산물 수입액은 지난해 8억2570만달러(1조872억원)로 한·칠레 FTA 발효 전인 2003년 5200만달러(684억원)보다 15배가량 증가했다.
최범진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실장은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참여 등으로 대외경제정책 방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농축산물시장 추가 개방이 이뤄진다면 농심이 급격히 악화할 수 있으므로 농축산물은 협상 대상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농민신문 5월 26일>